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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

21세기 한국_ 융복합 소몰이


>>예리한 감성에 구체성 더하기가 필요한 때
_융복합에 소몰이하는 최근 한국의 문화예술정책 
_개념예술과 융복합을 헛갈려하는 건 아닐까?
_융복합으로 성공한 예술가의 사례가 있기는 한지!

드러내는 방식이나 바라보는 관점의 전위적 행태와 더불어 예술행위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이 현재의 현대예술의 초상이다.
collaboration, 융복합, 통섭의 용어가 난무하지만, 결국 창작이라는 행위는 지극히 개별적인 인식과 경험, 더불어 개인의 논리로 전개되는 속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

최근 공공문화정책에서 밀어부치는 융복합이란 문화초점에서 다루는 장르간 결합이라는 것이 단순한 기계적, 형태적 조합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를 위해서 어떤 장치와 환경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10여년전 말 그대로 태풍과 같은 이슈를 만들어내면서 세계미술계에 스타로 떠오르며, 여전히 그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영국의 데미안 허스트를 세계가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가 내어놓는 작품의 형태적 충격이 아니라, 그가 제시한 예술가의 역할과 자질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과 논리가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구체화되어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불러일으킨 지점이 말 그대로 먹힌 것이다. 그리고 개념미술의 전형이면서도 미술자본의 혜택을 엄청나게 누리고 있다.
현대미술시장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우리가 YBA(Young British Artist)라 부르는, 그리고 이미 영국의 현대미술을 대변하는 하나의 브랜드로 세계시장에 자리잡은 영국의 젊은 미술가들의 성공사례가 모두 이와 맞닿아 있다. 물론 재미나게도 영국의 미술시장은 이러한 개념미술과 이에 반하는 미술 모두 각자의 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그만큼 다양한 향유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술뿐만 아니라 장르를 막론하고 소위 잘나가는 현대예술의 직업예술가들의 공통점은 완성된 결과물의 형태적 양식이 아니라, 작업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와 얘기를 표현해내는 방식에 있어서의 자신만의 독특함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융복합에 얽매이지도 않을뿐더러, 이를 가정한 작업을 하지는 않는다. 장르의 벽이 불분명해진 것이 현대예술의 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사실 과정상에 예술가가 이를 전제에 두고 작업하지 않는 것은 두 말할 나위없다. 필요와 취향 때문에 취하는 것이라고 봐야한다. 

최근 한국에서의 문화정책이나 권장지침 등을 보면, 
형태적이든 내용적이든 장르간, 영역간 결합을 포함한 소위 융복합의 틀에 맞추어진 작업에 All-in 하는 듯 보인다. 심지어 현장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다원이니, 융복합이니 하는 장르화된 그 개념에 맞추어 끼워넣은 데에 많은 고민과 시간을 소모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유행처럼 논의되고 있는 개념예술이라는 것도 인류의 예술사에서 보면 지극히 최근의, 불과 40여년 정도의, 작업이며 이는 전체 예술에서 아주 작은 범주를 가지고 있는 예술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현대예술(contemporary art)이라는 용어는 학예사적 입장에서 분류하고 분석하는 장치이지 예술가와 그들의 생각과 논리, 그리고 이들의 작업물을 평가하는 기준은 아닌 것이다. 
더욱이 대중은 그러한 분류의 관점에서 예술을 이해하고 소비하지 않는다. 
개념예술의 목장 안에 예술가들을 소몰이 하듯이 몰아가고 있다. 또 그 실체 없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현대예술의 조류를 못 따라가는 올드한 작업으로 분류되고 있다.
중앙이나 지역을 막론하고 재단과 기관의 예술지원 방향과 규모가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문화예술이 경쟁력이라는 미래적 가치를 5년 단위의 성과물로 일구어내려는 반복되는 상황에서 과연 공공정책에 인식하고 있는 예술은 무엇이며, 예술가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피카소, 데미안 허스트, 백남준, 비틀즈, 마이클 잭슨 같은 아티스트를 원하는 것인지?
국민의 25% 이상이 미술품 구매경험이 있는 영국의 미술시장 같은 환경을 원하는 것인지?

한 때, 에딘버러나 아비뇽 페스티벌에 진입하는 공연단체를 집중정책으로 다른 해외페스티벌이나 극장에 진출하는 많은 공연예술가들이 지원을 받지 못한 경우가 있다. 당시의 집중 공략마켓이라는 이유로 몰아주기를 한 건데, 한 십년 몰아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2년 반짝으로 그치는 참으로 허무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대상이 아비뇽이나 에딘버러가 다른 무언가로 바뀔 뿐 늘 같은 양상이 반복되고 있다. 계속 무언가로 한정하여 몰아가는 것이다.
확률게임으로 보더라도 공공연히 언급되는 위대한 스타들은 전체 예술가 중 0.01%도 안되는 확률이다. 에릭클랩튼의 기타연주는 소리만 들어도 그인걸 알 수 있는 것처럼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독특함이 명인의 입지를 만들어준다. 
영향과 자극은 주고받는 충돌과 조화의 판을 조성해주면 된다.
벤치마킹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예술가는 전략가나 마케터가 아니다.

호흡이 짧다 못해 천박하다.
예술가가 그냥 예술가일 수 있도록 하자.
각자의 예리한 감성이 거침없이 예리해질 수 있도록 내버려 두자.
자꾸 필터를 가져다 들이대지 말자.

요즘 추세는... 이슈는... 해외시장의 취향은.. 등등
이런 허망한 망을 통과하게끔 몰아 부치지 말자.
지켜보고 북돋아 주면 된다. 지원이란 명목아래 실체 없는 박스 안에 가두려 하지 말자.
예술은 비지니스의 소스는 될 수 있지만, 거대 시스템이나 영향력있는 정책권자의 성과물 창출 전략의 도구가 되어선 안된다. 또한 그들의 욕망 해소 창구가 되어선 더더욱 안된다. 

정말 한방 날리고 싶다면,
어느 것이든 괞찮으니 백년만 편협하게 밀어달라.